수이 다이너스티 지다이 연표

  //서기 594년 수나라 개황 14년에 신라 왕 진평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수나라 황제 문제가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 왕에 배수(拜授) 하였다. (以隋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_북사 신라전 隋나라 開皇 14년 (A.D.594; 新羅 眞平王 16)에 遣使하여 方物을 바쳤다. 文帝는 眞平을 上開府 樂浪郡公 新羅王에 拜授하였다.

근대 시대 연표

 근대 시대 연표 // 1880년대부턴 슬슬 연발 볼트액션소총도 나왔다... 르벨 1886 소총, 게베어 1888 소총 등등 근대 시대 미군 무장 플리머스 총 , 스프링필드 소총 ,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 7연발 스펜서 카빈소총,  콜트 해군 리볼버 _ GrimReaper Kim의 말 https://youtu.be/e8Q4m1FBGLE?si=k8igcdXCA3c_Guf-

일본 헤이안 시대 연표

일본 헤이안 시대 연표 //서기 969년 안나의 변 발생  안나의 변(969)은 헤이안 시대의 정변으로 이로 인해 좌대신 미나모토노 다카아키라가 유배되고, 후지와라 가문이 압도적 지배체제를 구축합니다. 표면상 미나모토노 다카아키라의 모반 시도가 발각된 사건이지만, 정황상 후지와라 측이 조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떤 사람이 적은 고려 현종 연표

어떤 사람이 적은 고려 현종 연표 https://gall.dcinside.com/koryokhitanwar/62818 1010년 : 거란 2차 침입 1011년 : 현종, 피난길에 김은부의 딸 셋 만남. 원성왕후와 첫 동침 1014년 : 김훈,최질의 난 1016년 : 덕종 출산 (원성왕후 소생) 1018년 : 정종 출산 (원성왕후 소생) 1018년 : 거란 3차 침입 (귀주대첩. 강감찬 주도) 1018년 : 4월. 원정왕후 사망 1019년 : 문종 출산 (원혜왕후 소생)              - 원혜왕후 (김은부의 둘째딸 - 문종,평양공 왕기,효사왕후 출산)                -> 처음 안복궁주로 봉해진뒤 나중에 왕후로 봉해짐 스토리상 천상 극 후반이 김훈,최질의난->거란 3차침입->귀주대첩으로 마무리 될것 같은데 그렇게되면 그때까지 극 중반부는 김은부 세딸(원성,원혜,원평왕후 3자매와) 원정왕후측의 기싸움 장난 아닐듯 문제는 원성,원혜등이 입궁해서 정식 왕후가 된 시기가 언젠지가 분명치 않다는건데...일단 원성이 덕종을 출산한게 1016년이니 1011년 첫 만남 이후로도 5년의 공백기간이 있음 만약 고려거란전쟁이 한 50부,100부로 가는 장편극이었다면 극 중반부가 사실상 준 여인천하처럼...좀 지루하게 흘러갈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저 시기문제때문에 그렇게 역사대로 안가고 좀 하나로 뭉뚱그려서 빠른속도로 진행하지 않을까 그걸 예상하는중임 예고편에 갑자가 원정왕후(1018년 사망)가 현종 쓰러진 틈을타서 갑자기 임금이라도 되는듯 행세하는것도...아마 그렇게 극중 전개를 빠리게 하기위한 복선인것 같음 - 아무리 왕하고 왕비 금슬이 좋았다고 해도 자기가 쓰러진동안 왕비가 자기대신 왕 행세하고 있으면 그거 용납할 임금은 아마 전 세계 통털어 거의 없을듯  이게 그래서 덕종(9대), 정종(10대), 문종...

삼국지 동이전 시대 연표

  //서기 239년  “景初二年”은 ‘景初三年’(239)의 誤記이다. 왜냐하면 『日本書紀』에 인용된 『魏志』와 『梁書』는 모두 “三年”으로 기재하였기 때문이다(石原道博, 2005:50). 景初 2년까지 약 50년간, 公孫氏가 요동에서 세력을 떨쳐 일시적으로는 독립하여 燕王을 자칭하였으므로, 왜국의 사자는 魏에 갈 수 없었다. 景初 3년 정월에 이르러 위는 본격적으로 공손씨를 공격하여 8월에 이르러서 드디어 승리를 거두고, 요동에서 낙랑, 대방에 이르는 지역을 위의 지배로 편입하였다. 이처럼 景初 3년에 요동, 낙랑 등 5군이 平州로 편제되어 위의 땅이 되면서, 왜국은 직접 위에 사자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森浩一, 1985: 143~144).

후한 연표

  //  [後漢] 建武 6년(A.D.30; 高句麗 大武神王 13) 에 변경의 郡을 줄였는데, [沃沮의 東部]都尉도 이 때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토착민의] 우두머리(渠帥)로 모두 縣侯를 삼으니, 不耐註 113·華麗註 114·沃沮註 115등의 諸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사마씨 진제국 연표

  서기 274년에 사마씨 진나라는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으며,  평주자사가 동이교위(東夷校尉)를 겸임하였다. 서기 285년에 부여가 선비 모용외(慕容廆)에 의해 격파되자 부여의 복국을 추진하는 등  진의 동방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서기 285년 이후' 이후 요동지역에서 선비족 모용씨의 득세에 따라 평주자사나 동이교위의 역할이 점차 약화되었다.  // 서기 291년 8왕의 난으로 시작된 진 중앙의 혼란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권위와 교역체계가 무너지는 상황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 제위 14년(313) 음력 겨울 10월에 낙랑군(樂浪郡)註 001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낙랑군과 대방군의 통솔자는 요동 출신의 장통(張統)이었는데, 진의 정부에 의해 태수로 임명된 인물이라기보다는 요동지역의 세력가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더 이상 진에 의한 동방 정책 추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을 시사한다. //서기 313년 음력 4월   『자치통감』 권88 진기10 효민황제(孝愍皇帝) 상 건흥(建興) 원년(313) 4월조에는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을 점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한 것이 해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이 장통에게 말하여 그 백성 1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니, 모용외가 그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라고 기술되어 있다.